끝에 e가 있는 앤 2018. 9. 21. 04:06

(9월 18일 오전 4시)


 노트북 앞에 앉으면 집중이 잘 되지 않고 자꾸 딴짓만 해서 아예 씻고 누워 메모장에 쓰고 있다. 오늘 내가 집에 도착하는 대로 정리해서 티스토리에 옮겨 붙이려고 한다.


  그동안 많은 얘기들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 창을 켜서 한 문단 넘게 쓴 날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임시저장만 하고 꺼 버렸다(그리고 티스토리의 임시저장 기능은 별로 믿을 것이 못 된다).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계속 고민했다. 주제를 미리 잡아 놓고 나름 체계적으로 쓰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그날 생각나는 것을 자유롭게 쓰는 것이 좋을지 같은 것을 고민하면서 계속 미뤘다. 전자는 부담이 될 것 같았고 후자는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나중에 보다 자세히 쓰겠지만 요즘 나는 제대로 된, 그러니까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전혀 못 하고 있고, 이것이 스트레스 원인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게 계속 미뤘다. 두려움 → 고민 → 미루기, 요즘 내 일상은 모두 이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실제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아직도 어떤 방식이 좋을지, 나아가 이런 걸 쓰는 게 과연 의미가 있기는 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맞닥뜨린 적 없는 위기를 겪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한 것 같다. 더 미루면 정말 안 될 것 같았다. 한 줄밖에 못 쓰더라도 일단 뭐라도 남겨 놓는 것이 낫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고 있다.


  아무튼 요즘 나는 위기다.

  여러 증세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과 연락을 못 하게 됐다. 카톡, 문자, 트위터, 인스타 모두 마찬가지다. 트위터에는 내 신변에서 비교적 먼 편이고 (어떻게 보면 그 점 덕에) 나의 이런 상태를 아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나마 좀 편하지만, 멘션이나 디엠 답장을 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메시지를 받고 나서 한참 기다렸다가 답장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가끔은 손이 덜덜 떨리기도 한다. 보내 놓고 다시 답장이 오면 그걸 보는 것도 두렵다. 카톡은 말할 것도 없다. 상태 메시지에 '당분간 답장 느립니다' 라고 바쁜 척을 해 두었다. 평소 카톡을 많이 받는 사람도 아니지만 오더라도 답장을 할 수가 없다. 답장하는 것이 어렵다. 무섭다. 이전까진 도대체 어떻게 답장을 했는지, 어떻게 사람들과 평범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모르겠다. 고백하자면, 지금도 카톡에는 최근 한 달 간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가 100개 정도 쭉 쌓여 있다. 가장 친한 친구인 J의 카톡이나 단톡의 중요한 공지 정도만 확인하고 밑에 있는 메시지들은 확인도 답장도 대책 없이 미뤄 놓은 상태이다. 메시지들을 보낸 상대는 이제 기다리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관계 몇 개가 끊어질까? 누가 나 같은 사람을 견뎌 줄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점점 더 무서워진다....


  개인상담을 받았을 때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말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사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외부에서만 봤을 때 내가 고립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일단 해야 할 일은 다 하고 있다. 병을 알기 전에도 그랬고, 알고 난 후에도 이것 때문에 일을 미룬 적은 없는 것 같다(그게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좋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집에서는 방 안에 있는 시간이 길긴 하지만 다른 집과 비교해서도 가족 간의 대화 시간이 긴 편이다. 친구가 대단히 많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딱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있고 관계도 원만하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주변에 정말 활동적인 친구들과 비교해 보면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닌 것 같지만 원래 혼자도 잘 노는 성격이고 운동도 하고 있다.

  상담을 하면서 방의 문고리를 잡는 것이, 그러니까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요즘 그런 식의 두려움은 별로 느끼지 못한 것 같다. 대신 요즘은 어딜 가든 방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방을 나와도 그 안에 있는 것과 똑같다는 얘기다. 벽장처럼 작게 쪼그라든 방을 내가 짊어지고 다니는 것 같다. 예전에는 방을 나오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어디든 내 방이나 마찬가지니까 어딜 가든 숨을 쉴 수가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말하는 것이 전부 방 안에서 창문으로 바깥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끔은 내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몸의 다른 부분은 다 죽고,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는 눈만 남은 기분이다.


  이렇게 적어 보니 나는 확실히 정서적으로 고립된 것 같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외롭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이 정신 안에 외롭다는 감정이 들어설 곳이 없다. 외로움을 느끼기에 나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정말 끔찍하게 무섭다. 접촉하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멀쩡히 살아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대로 가면 실제로 고립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지금처럼 어떻게든 꾸역꾸역 이전과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한계가 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들은 나를 정말로 두렵게 한다.




(21일 오전 4시에 고치면서 덧붙임)


  한심한 얘기지만 그동안은 무서워서 병원에 전화도 걸지 못했다. 이틀 전인 수요일에 겨우 용기를 내어 예약을 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병원에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