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다음의 4가지를 먼저 점검해야 한다.
1. 잠을 적당히 잤는지? ('적당히'가 중요하다. 잠을 너무 많이 자는 것도 증상 중 하나다)
2. 밥을 먹었는지?
3. 씻었는지?
4. 방이 너무 지저분하지는 않은지?
나도 어디서 주워들은 것에 가깝긴 한데, 아마 질환이 있는 사람들에겐 보편적으로 알려진 리스트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내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거의 대부분 위 4가지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저 4가지가 우울의 근원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저것들이 해결된다고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을 제대로 구가할 수 없기 때문에 우울한 게 아니라 우울해서 일상을 제대로 구가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러면 우울이 심화되는 것은 맞지만. 아무튼 개선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나쁜 상태가 더 상태가 나빠지지 않도록 어떻게든 궤도 위에 도로 올려 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요지다.
우울이 수용성이라는 말은 질문 3과 관련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늘 얘기하지만, 이 블로그에 쓰는 글은 전부 다른 환자들에게 전혀 해당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오직 나의 경우만을 염두에 두고 쓰고 있다.) 씻을 힘을 내지 못하고 침대에 계속 웅크려 있는 것은 내 증상 중 하나이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머릿속은 바쁘다. 1초에 100가지도 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데, 그중 대부분이 부정적인 사고이다. 침대 바닥으로 점점 가라앉는 것처럼 부정적인 사고는 점점 더 부정적으로 변하고 금세 자살사고에 도달한다. 이때쯤 되면 오히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냥 이대로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다. 아니면 반대로 어떻게든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쓰면서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한다(대부분의 경우 손이 떨린다). 검색했던 것을 또 검색하고, 몇 분 전에 들어갔던 페이지를 또 들어가면서 주의를 돌리려고 애쓴다. 물론 주의 돌리기에는 100% 실패하고 다시 부정적인 사고가 파고들게 된다. 이게 가족이 '쟤는 하루종일 잠만 자네.'라고 나를 타박하는 상황에서 나에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정말로 피곤해서 열두 시간 넘게 자는 경우 말고).
그래서 나는 방금 씻고 왔다. 요즘 나의 식생활은 엉망이고, 잠은 1~2시간 이상 제대로 자 본 적이 없고, 방은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어질러져 있지만 그래도 일단 샤워를 하고 오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더 미루지 말고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기분이 씻은 직후보다도 훨씬 더 나아져 있을 것이다. 별 것 아닌 것이라도 꾸준히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매우 큰 성취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병과 떼어 놓고 생각해 봐도, 꾸준함은 내가 아주 중시하는 덕목이다.
사실 원래 이번 글은 이런 내용으로 쓸 예정이 아니었다. 1월 30일에 전혀 다른 내용으로 쓴 미완의 글이 있었다. 만약 그때와 지금의 상태가 비슷했더라면, 그 글을 보충해서 마무리하고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때 썼던 글은 이 글 마지막에 붙여 넣겠다.
지금 나는 아주 취약한 상태이다. 하루에도 열 번은 넘게 감정이 오락가락한다. 여기에는 명확한 원인이 있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여 준비해 왔던 일이 (정말이지 나에게는 어떤 책임도 없는 이유로) 어그러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예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고, 내가 할 수 없는 일도 없어서 몹시 무력한 기분이다. 주변에 나를 도와줄 사람도 없고 온전히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도 나를 힘들게 한다.
요즘 겨우 잠에 들면 악몽을 꾸고, 1~2시간 뒤에 땀에 흠뻑 젖어서 깨고 있다. 성격상, 나는 계획했던 일이 무너지는 것에 아주 취약한데, 여기에 두 가지가 상태 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첫째는 병이고, 둘째는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누구도(나 자신을 포함해) 탓할 수 없는 일이니 머리를 비우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으로 되돌아간다. 스트레스 받으면 충동구매로 과소비하는 버릇을 고치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이번 일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벌써 돈을 너무 많이 써 버렸다. 이렇게 되면 나는 좋은 타깃을 하나 잡은 셈이다. 이제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기 자신을 탓함 → 부정적인 사고 → 제대로 된 일상을 유지하기 힘들어짐 → 이번에는 그런 자신을 탓함 → 더욱 부정적인 사고, 자극에도 더욱 취약해짐.....세상에 이보다 더 끔찍한 악순환이 있을까?
* * *
(1월 30일에 썼던 글)
충동
나에게는 이상한 감정의 연쇄가 일어날 때가 있다. (이런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버릇이나 습관 같은 말은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이라도 행복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 갑자기 너무너무 슬퍼진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줄줄 흐르고 심지어 토할 것처럼 슬프다. 그리고 죽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에 나는 병원에 다녀왔다. 죽고 싶다는 충동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무렵 나는 아주 행복했다(행복이라는 말을 남발하고 싶지는 않지만). 행복했던 것 같다(정정). 거의 밀린 숙제를 처리하듯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그동안 상태가 좋지 않았음을 해명하고, 솔직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좋은 자극을 얻기도 했다. 또는 그냥 재미있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많이 웃었고 온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점점 더 예의 그 충동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스스로 설명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더 괴로웠다. 병원에 가서 나는 아침 저녁으로 한 알씩 먹는 비상용 항불안제를 받았다.
처음 이 현상과 마주했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처음으로 진짜 알바다운 알바를 하고 알바비를 받았을 때였다. 집으로 오는 길에, 엄마와 아빠에게 각각 두 장씩 건네기 위한 오만원권을 인출했다. 뿌듯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줄줄 나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돈이 아까워서는 절대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행복했다. 행복하기 때문에 이제 모든 것을 끝내도 될 것 같았다.
아마 이것도 증상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영문도 모른 채 턱끝까지 차오른 충동에 이리저리 휩쓸릴 수밖에 없다. 충동에 대한 이 비유는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키에 맞지 않는 파도풀에 들어가 온몸을 가누지 못하고 휩쓸리는 느낌이다. 그럼 나는 마구 버둥거린다. 생각이 전혀 제어되지 않는다. 수십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깜빡거린다. 나 자신이 둘보다도 훨씬 많은 수로 분열된 것 같다.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머릿속에서 이 자신과 저 자신이 아무 말이나 계속 떠드는 기분이다. 최대한 간결하고 이성적인 말로 설명하고 싶었지만 이것에 관해서만큼은 이런 비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