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주간은 약을 꼬박꼬박 먹었다. 첫째로는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약을 제대로 챙겨먹지 않으면 정말 큰일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작년과 같은 상태에 놓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도 작년 이맘때를 떠올리는 것이 무섭다. 정정한다. 사실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누가 도려내 간 것처럼 작년 이맘때의 기억이 없다. 며칠 전 오랜만에, 예전에 걸었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재작년이나 그 전 해의 생각이 나서 좋았다. 작년에는 산책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면 뭘 했나? 작년 봄과 초여름에 나는 어떻게 살았나? 그 시간들은 어디로 갔지? 떠오르는 기억은 딱 하나다. 통장에 돈이 없어서 진료비와 약값을 내지 못하고 집에 전화했던 기억. 그 후에 건물 계단에서 비참함에 울었던 기억. 누구에게도 도움받을 수 없겠구나 생각한 기억.
나는 여전히 스트레스 받으면 돈을 써버리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3월에는 목표를 세웠다.
사태가 심각해지고 확실하게 유학을 포기한 이후, 한동안은 상태가 오히려 좋았다.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좋았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일년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기가 오고 있었다. 나는 올해 이뤄내고 싶은 것들의 목록을 야심차게 다시 만들었다. 이런저런 항목이 많았지만 결국은 늘 바라온 것처럼 내실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읽을 책을 잔뜩 샀고, 여러 방면의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했고, 계획을 세워 실천하고 하루 끝에는 그날의 성취를 돌아보는 성실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런 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지금 그 목록을 보고 있다. 유지하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게 속상하게 느껴져야 하는데 아무런 감상이 없다. 남이 세운 목표들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가끔씩, 상태가 아주, 아주 좋을 때의 나와 나쁠 때의 내가 전혀 다른 사람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왜 병원에만 가면 이런 것을 설명하지 못하는지!)
'이상하게' 좋았던 기간이 끝나고 나는 이제 내가 어떤 '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내 상태가 언제 곤두박질칠지, 그 순간이 오기 앞서 그 '감'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알 수 있다고 해서 증상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4월 중순부터 나는 시시콜콜 적기도 힘든 이 병의 각종 증상들에 시달렸고 그중 하나가 충동적인 소비였다. 3월에 세운 계획에 적금 넣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적금을 넣기는커녕 만기된 적금을 타서 근근히 생활하고 있다. 이런 나의 행동은 자기혐오를 부른다. 자기혐오는 내가 생각하는 내 병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고, 나의 가장 오래된 사고방식이자 생활 패턴이고, 나를 움직이는 동시에 갉아먹는 힘이고, 나를 설명하는 데 가장 좋은 단어,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 그냥……나 자신, 나 자체다.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나 자신보다 나를 미워할 수 없다. 이 점이 나를 가장 단단하고 가장 취약하게 만든다(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다행인 소식도 있다. 나는 이제 자조自助의 방법도 조금씩 익히고 있다. 몸을 움직이는 새로운 취미를 찾았고, 되든 안 되든 여러 일에 계속 도전하고 있으며, 속으로는(정신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겉으로 보이기로는 예전보다 스스로에게 여유를 주게 되었다. '못 해도 괜찮다'고, 이제 생각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다. '잘 안 될 수도 있지'라고. 그리고 약도 꾸준히 챙겨먹고 있다.
나는 이 병을 완치할 수 없다. 지나친 산만함과 같은 후유증, 예전 기억들에 대한 트라우마, 현재진행형인 증상 등과 나는 살고 있다. 하지만 '살고 있다'……그건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닌지? 나는 조금씩 이 병을 데리고 살아가는 법을 알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