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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0.05.20 自助
  2. 2020.03.01 수용성, 충동
  3. 2019.12.25
  4. 2019.11.29 일상
  5. 2019.06.24 농담
  6. 2018.11.29 구토
  7. 2018.11.13 그동안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
  8. 2018.10.14 태도
  9. 2018.09.21 위기
  10. 2018.08.31 병에 대한 이야기

自助

카테고리 없음 2020. 5. 20. 05:28

  지난 3주간은 약을 꼬박꼬박 먹었다. 첫째로는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약을 제대로 챙겨먹지 않으면 정말 큰일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고, 둘째로는 작년과 같은 상태에 놓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직도 작년 이맘때를 떠올리는 것이 무섭다. 정정한다. 사실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누가 도려내 간 것처럼 작년 이맘때의 기억이 없다. 며칠 전 오랜만에, 예전에 걸었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재작년이나 그 전 해의 생각이 나서 좋았다. 작년에는 산책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면 뭘 했나? 작년 봄과 초여름에 나는 어떻게 살았나? 그 시간들은 어디로 갔지? 떠오르는 기억은 딱 하나다. 통장에 돈이 없어서 진료비와 약값을 내지 못하고 집에 전화했던 기억. 그 후에 건물 계단에서 비참함에 울었던 기억. 누구에게도 도움받을 수 없겠구나 생각한 기억.
  나는 여전히 스트레스 받으면 돈을 써버리는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3월에는 목표를 세웠다.
  사태가 심각해지고 확실하게 유학을 포기한 이후, 한동안은 상태가 오히려 좋았다.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좋았다. 날씨가 너무 좋았다. 일년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기가 오고 있었다. 나는 올해 이뤄내고 싶은 것들의 목록을 야심차게 다시 만들었다. 이런저런 항목이 많았지만 결국은 늘 바라온 것처럼 내실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읽을 책을 잔뜩 샀고, 여러 방면의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했고, 계획을 세워 실천하고 하루 끝에는 그날의 성취를 돌아보는 성실한 사람이 되고자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흘러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런 순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지금 그 목록을 보고 있다. 유지하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게 속상하게 느껴져야 하는데 아무런 감상이 없다. 남이 세운 목표들을 보고 있는 것 같다. 가끔씩, 상태가 아주, 아주 좋을 때의 나와 나쁠 때의 내가 전혀 다른 사람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왜 병원에만 가면 이런 것을 설명하지 못하는지!) 
  '이상하게' 좋았던 기간이 끝나고 나는 이제 내가 어떤 '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내 상태가 언제 곤두박질칠지, 그 순간이 오기 앞서 그 '감'으로 알 수 있을 것 같다. 알 수 있다고 해서 증상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다. 4월 중순부터 나는 시시콜콜 적기도 힘든 이 병의 각종 증상들에 시달렸고 그중 하나가 충동적인 소비였다. 3월에 세운 계획에 적금 넣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적금을 넣기는커녕 만기된 적금을 타서 근근히 생활하고 있다. 이런 나의 행동은 자기혐오를 부른다. 자기혐오는 내가 생각하는 내 병의 근본적인 원인 중 하나고, 나의 가장 오래된 사고방식이자 생활 패턴이고, 나를 움직이는 동시에 갉아먹는 힘이고, 나를 설명하는 데 가장 좋은 단어, 나의 가장 오래된 기억,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 그냥……나 자신, 나 자체다.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나 자신보다 나를 미워할 수 없다. 이 점이 나를 가장 단단하고 가장 취약하게 만든다(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그러나 다행인 소식도 있다. 나는 이제 자조自助의 방법도 조금씩 익히고 있다. 몸을 움직이는 새로운 취미를 찾았고, 되든 안 되든 여러 일에 계속 도전하고 있으며, 속으로는(정신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겉으로 보이기로는 예전보다 스스로에게 여유를 주게 되었다. '못 해도 괜찮다'고, 이제 생각하는 척이라도 할 수 있다. '잘 안 될 수도 있지'라고. 그리고 약도 꾸준히 챙겨먹고 있다. 

  나는 이 병을 완치할 수 없다. 지나친 산만함과 같은 후유증, 예전 기억들에 대한 트라우마, 현재진행형인 증상 등과 나는 살고 있다. 하지만 '살고 있다'……그건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닌지? 나는 조금씩 이 병을 데리고 살아가는 법을 알아가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 그래야 한다.

by 끝에 e가 있는 앤

  '우울은 수용성'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다음의 4가지를 먼저 점검해야 한다. 

1. 잠을 적당히 잤는지? ('적당히'가 중요하다. 잠을 너무 많이 자는 것도 증상 중 하나다)
2. 밥을 먹었는지?
3. 씻었는지? 
4. 방이 너무 지저분하지는 않은지?

 

  나도 어디서 주워들은 것에 가깝긴 한데, 아마 질환이 있는 사람들에겐 보편적으로 알려진 리스트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내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거의 대부분 위 4가지가 이루어져 있지 않다. 중요한 것은 저 4가지가 우울의 근원은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다. 저것들이 해결된다고 문제가 모두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을 제대로 구가할 수 없기 때문에 우울한 게 아니라 우울해서 일상을 제대로 구가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그러면 우울이 심화되는 것은 맞지만. 아무튼 개선까지는 되지 못하더라도, 나쁜 상태가 더 상태가 나빠지지 않도록 어떻게든 궤도 위에 도로 올려 놓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요지다.

  우울이 수용성이라는 말은 질문 3과 관련이 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늘 얘기하지만, 이 블로그에 쓰는 글은 전부 다른 환자들에게 전혀 해당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오직 나의 경우만을 염두에 두고 쓰고 있다.) 씻을 힘을 내지 못하고 침대에 계속 웅크려 있는 것은 내 증상 중 하나이다. 몸은 가만히 있는데 머릿속은 바쁘다. 1초에 100가지도 넘는 생각들이 머릿속을 돌아다니는데, 그중 대부분이 부정적인 사고이다. 침대 바닥으로 점점 가라앉는 것처럼 부정적인 사고는 점점 더 부정적으로 변하고 금세 자살사고에 도달한다. 이때쯤 되면 오히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을 때도 있다. 그냥 이대로 모든 것을 끝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머리가 꽉 찬다. 아니면 반대로 어떻게든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쓰면서 핸드폰으로 이것저것 찾아보기도 한다(대부분의 경우 손이 떨린다). 검색했던 것을 또 검색하고, 몇 분 전에 들어갔던 페이지를 또 들어가면서 주의를 돌리려고 애쓴다. 물론 주의 돌리기에는 100% 실패하고 다시 부정적인 사고가 파고들게 된다. 이게 가족이 '쟤는 하루종일 잠만 자네.'라고 나를 타박하는 상황에서 나에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정말로 피곤해서 열두 시간 넘게 자는 경우 말고).

 

  그래서 나는 방금 씻고 왔다. 요즘 나의 식생활은 엉망이고, 잠은 1~2시간 이상 제대로 자 본 적이 없고, 방은 눈 뜨고 봐줄 수 없을 정도로 어질러져 있지만 그래도 일단 샤워를 하고 오니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더 미루지 말고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기분이 씻은 직후보다도 훨씬 더 나아져 있을 것이다. 별 것 아닌 것이라도 꾸준히 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 매우 큰 성취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병과 떼어 놓고 생각해 봐도, 꾸준함은 내가 아주 중시하는 덕목이다.

 

 사실 원래 이번 글은 이런 내용으로 쓸 예정이 아니었다. 1월 30일에 전혀 다른 내용으로 쓴 미완의 글이 있었다. 만약 그때와 지금의 상태가 비슷했더라면, 그 글을 보충해서 마무리하고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때 썼던 글은 이 글 마지막에 붙여 넣겠다. 

  지금 나는 아주 취약한 상태이다. 하루에도 열 번은 넘게 감정이 오락가락한다. 여기에는 명확한 원인이 있다. 내가 아주 오랫동안 공을 들여 준비해 왔던 일이 (정말이지 나에게는 어떤 책임도 없는 이유로) 어그러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예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르는 상황이다. 현재로서는 아직 아무것도 확실한 것이 없고, 내가 할 수 없는 일도 없어서 몹시 무력한 기분이다. 주변에 나를 도와줄 사람도 없고 온전히 내 힘으로 어떻게든 해 나가야 한다는 사실도 나를 힘들게 한다.

  요즘 겨우 잠에 들면 악몽을 꾸고, 1~2시간 뒤에 땀에 흠뻑 젖어서 깨고 있다. 성격상, 나는 계획했던 일이 무너지는 것에 아주 취약한데, 여기에 두 가지가 상태 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첫째는 병이고, 둘째는 바깥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없다는 사실이다. 어차피 누구도(나 자신을 포함해) 탓할 수 없는 일이니 머리를 비우고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자꾸만 부정적인 생각으로 되돌아간다. 스트레스 받으면 충동구매로 과소비하는 버릇을 고치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이번 일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벌써 돈을 너무 많이 써 버렸다. 이렇게 되면 나는 좋은 타깃을 하나 잡은 셈이다. 이제 나쁜 버릇을 고치지 못한 나 자신을 탓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기 자신을 탓함 부정적인 사고 제대로 된 일상을 유지하기 힘들어짐 이번에는 그런 자신을 탓함 더욱 부정적인 사고, 자극에도 더욱 취약해짐.....세상에 이보다 더 끔찍한 악순환이 있을까?

 

 

 

* * *

 

 

 

(1월 30일에 썼던 글)

충동

 

  나에게는 이상한 감정의 연쇄가 일어날 때가 있다. (이런 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버릇이나 습관 같은 말은 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조금이라도 행복과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면 갑자기 너무너무 슬퍼진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줄줄 흐르고 심지어 토할 것처럼 슬프다. 그리고 죽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인다.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날에 나는 병원에 다녀왔다. 죽고 싶다는 충동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무렵 나는 아주 행복했다(행복이라는 말을 남발하고 싶지는 않지만). 행복했던 것 같다(정정). 거의 밀린 숙제를 처리하듯 많은 사람들과 만났다. 그동안 상태가 좋지 않았음을 해명하고, 솔직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좋은 자극을 얻기도 했다. 또는 그냥 재미있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많이 웃었고 온몸이 따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는 점점 더 예의 그 충동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었다. 스스로 설명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더 괴로웠다. 병원에 가서 나는 아침 저녁으로 한 알씩 먹는 비상용 항불안제를 받았다.
  처음 이 현상과 마주했을 때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처음으로 진짜 알바다운 알바를 하고 알바비를 받았을 때였다. 집으로 오는 길에, 엄마와 아빠에게 각각 두 장씩 건네기 위한 오만원권을 인출했다. 뿌듯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갑자기 눈물이 줄줄 나면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돈이 아까워서는 절대 아니었다. 나는 정말로 행복했다. 행복하기 때문에 이제 모든 것을 끝내도 될 것 같았다. 
  아마 이것도 증상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이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영문도 모른 채 턱끝까지 차오른 충동에 이리저리 휩쓸릴 수밖에 없다. 충동에 대한 이 비유는 아주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나의 키에 맞지 않는 파도풀에 들어가 온몸을 가누지 못하고 휩쓸리는 느낌이다. 그럼 나는 마구 버둥거린다. 생각이 전혀 제어되지 않는다. 수십 가지의 생각이 머릿속에서 깜빡거린다. 나 자신이 둘보다도 훨씬 많은 수로 분열된 것 같다.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머릿속에서 이 자신과 저 자신이 아무 말이나 계속 떠드는 기분이다. 최대한 간결하고 이성적인 말로 설명하고 싶었지만 이것에 관해서만큼은 이런 비유를 사용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by 끝에 e가 있는 앤

카테고리 없음 2019. 12. 25. 11:21

  지금까지는 주로 나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제 관계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가 된 것 같다. 최근에 엄마의 추천으로 책을 한 권 읽었다. 거기에 내가 타인과 맺고 있는 관계에 대해 공감할 만한 문장이 있었다. 

 

많은 일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고, 그런 일들을 피하고 싶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기 힘들 것이다. 자신이 하는 말을 조심하느라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기 힘들고, 자신의 비밀이 탄로 나지 않게 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할 것이다. (중략) 나는 민감한 사람들을 위한 훈련 과정을 진행할 때 개방성과 솔직함이 얼마나 전염성이 강한지 발견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약점을 솔직하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약점을 공개할 용기를 얻는다.

 

  엄마가 말했다. "너는 너무 사람들에게 벽을 치고 살아. 나도 그랬어. 그런데 살다 보니까 그게 좋지 않다는 걸 이제 알게 됐어." 이 말을 듣는 순간 예전에 친구가 했던 말이 오버랩됐다. "너는 비밀이 너무 많아." 나는 그때 깜짝 놀랐다. 나는 내가 내 얘기를 숨김 없이 다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가정 형편, 집안 사정 같은 얘기들까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그래서 생각해봤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지, 있다면 어떤 것들인지. 생각해 보니 다른 사람에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말한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이상한 일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를 꺼리는 가정 형편 같은 건 아무렇지 않게 말하면서, 겨우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말할 수가 없다니. 부끄러워서인가? 나는 한동안 그게 이유라고 생각했다.

  한참 뒤에야 나는, 내가 나의 깊은 감정과 관련된 것들을 일종의 치부나 약점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정말' 나 자신과 관련된 일에는 떳떳하지 못하고 수치심을 느낀다는 것이다.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나는 내가 한 말들이 내 약점이 될까봐 무섭다. 꼬투리를 잡혀 공격당할까봐 그런 것도 있지만, 꼭 공격당하지 않더라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이 나를 잘 알게 되는 것이 무섭다. 꿰뚫리는 것 같고 무장해제 당하는 것 같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것과 나에게서 내가 원하지 않는(의도하지 않은) 이미지를 보는 것이 무섭고, 내 의도와는 다른, '진짜' 나를 알게 될까봐, 겉과 속이 다른 나를 낱낱이 파헤칠까봐, 그래서 아주 깊은 곳까지 들여다 볼까봐 무섭다. 이런 생각들은 나를 아주 오랫동안 두렵고 불안하게 했다. (여기서 내가 사람을 못 믿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꼭 언급하고 싶다. 내가 못 믿는 것은 오직 나 자신의 견고함이다.)  
  나아가 나는 이런 공포가 열등감에서 비롯된 피해망상에 가깝다는 것을 안다. 이미 알고 있다. 

  사실 내가 모든 사람들에게 '벽을 치고' 사는 것은 아니다. 대학 동기들에게는 이미 내 병에 관한 이야기도 털어놓았다. 그 사람들과 있으면 '진짜' 나를 보여줘도 경멸당하거나 무시당하지는 않을 것 같다고 내심 안심하게 된다.
  고등학교 친구들을 만날 때는 다르다. 나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우리 사이에 투명 벽이 있다는 느낌을 가끔 받는다. 약점 감추기 게임을 하는 것 같다. 서로 눈치를 보고 견제하는 듯한 이상한 긴장감이 흐르고, 피상적인 대화가 오가고, 집에 가는 길은 몹시 허무하다.

  이들이 너무도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이 나를 더욱 괴롭게 한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말하고 싶은 게 아니다. 함께한 시간 대부분을 상당한 긴장 상태에서 보냈고, 모두 정도는 다르지만 어느 정도는 '민감한'(예민한) 사람들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계속 이렇게 흘러간다면 이 관계는 오래지 않아 흐지부지 끝나고 말 것이다. 나는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이 상황을 타파할 마음이 있다면(이것이 중요하다), 누구 하나가 자기 약점을 공개해야 할 것이다. 그걸 보고 다른 사람들도 안심하며 자기 약점들을 드러내기 시작한다면 이 전략은 성공이다. 엄마는 그 시작을 내가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 할 수 있을까? 아직은 잘 모르겠다.  

  위에서 잠깐 열등감 이야기를 꺼냈는데, 내 인간관계에 서려 있는 문제들은 열등감과 매우 깊고 오랜 관련이 있다. 본격적으로 정신질환이 진행되기 전에도 내 열등감이 도대체 어디서 기인했는지 생각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어려운 숙제 중 하나였다. 이 얘기는 시작하면 정말 한도 끝도 없으므로 이쯤에서 접겠다. 하지만 언젠가는 이것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 하는 때가 올 것이다.

 

  이번에는 병원에 가서, 집중력이 너무 떨어졌다고 말했다. 책을 읽는 것은 물론이고 대화도 이어나갈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산만하다고. 사실 왜 이제 와서 얘기하는지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너무나 오래된 증상이다. 어쨌든 약이 하나 바뀌었다. 설피딘정이 아리피졸정으로.

by 끝에 e가 있는 앤

일상

카테고리 없음 2019. 11. 29. 06:22

  휴학을 결정하고, 7월 중순부터 지금까지 쭉 일을 하고 있다. 

 

  방학 중엔 학교에서 일했고, 방학이 끝나자마자 또 금방 새 일을 구했다. 아무 생각 없이 출근과 퇴근만 생각하면서 살고 있다. 일은 바쁘다. 엄청 힘들지는 않지만 자잘하게 챙겨야 할 것이 많아 꼼꼼해야 한다. 요 며칠은 괜찮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수가 아주 잦은 편이었다. 나는 또 스트레스를 받았고 꿈에서도 출근하고 실수를 반복했다. 
  아침 일찍 집에서 나오기 때문에 버스정류장에 갈 때까지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할 때도 있다. 나는 길이 붐비기 전 한낮에 퇴근한다. 매일 거의 꽉 찬 버스로 붐비는 도로 위를 다녔던 것이 아주 먼 과거의 일 같다. 
  근무시간 동안 나는 혼자다. 교육기간에 매니저가 혼자 일하는 것을 좋아하냐고 물은 적이 있다. 좋아하면 잘 맞을 거라고. 그래서 이 일은 나에게 잘 맞는다. 꼭 등대지기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 동시에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매일 새로운 이벤트가 생기는 일이기도 하다. 다만 한번 만난 사람을 또 만날 일은 거의 없다. 만난 사람과 세 마디 이상 대화를 나눌 일도 없다. 모든 만남이 갑작스럽게 시작되고 갑작스럽게 끝나고 순식간에 잊힌다. 그래도 누군가 감사를 표하며 웃거나, 외국어를 잘 한다고 칭찬을 하거나, 사소한 친절이라도 베풀면 아무리 작은 것이어도 그날의 큰 기쁨으로 남는다. 
  그래서 지금까지는 일이 만족스럽고, 외국에 가기 전까지는 계속 할 생각이다. 매니저의 말대로 일이 조금 숙달되니 하루에 한 시간쯤 개인적인 일을 할 시간도 생겼다. (이 글도 그 시간에 적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그럭저럭 살고 있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행복하냐? 그렇지는 않다. 사실 행복하다고 느껴본 적이 없다. 행복이라는 감각이 어떤 건지도 모르겠다.
  한번도 지금의 상태에 만족한 적이 없다.
  이렇게 사는 것도 괜찮은가? (다들 이렇게 살고 있는 건가?)
  괜찮다는 생각이 안 들면 괜찮다고 생각하려고 애써야 하는 것일까?
  언제나 무언가 부족한 것 같은, 이 불만족스러운 기분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없앨 수 있을까? (없어질 수는 있나?)
  만약 나에게 허용된 것이 딱 여기까지라면?
  왜 나는 나에게 어울리는 것을 원하지 못할까?
  왜 나는 항상 분수에 넘치는 것만 바랄까?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고 왜 거짓말을 할까? 사실은 매 순간 머릿속에서 자기파괴욕구나 자기파괴에 가까운 강박관념과 싸우거나, 시기와 질투, 열등감, 까닭 없는 혐오를 몰아내려고 애쓰는 중이면서.


  한동안 약을 사흘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간격으로 먹었다. 그렇게 병원에 가야 할 날을 한 달 가량 미뤘다. 물론 아예 끊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괜찮았다. 아니, 반대로 괜찮았기 때문에 간격을 늘린 것이다. 몸을 써서 일을 하고 집에 와서 자는 생활을 반복하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거의 없었다(이 말은 진짜다). 어차피 나중에 물릴 것을 알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이런 말을 잘 하지 않지만, '조금 괜찮아진 것 같다'는 말을 써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정말 괜찮았다....괜찮았다고 생각한다. 괜찮아지는 듯 보였다. 아주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버텨나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의 잔잔한 우울감이면....
  다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너무 싫어서 견딜 수 없게 되자 나는 병원에 갔다.

 

  요즘은 다시 매일 약을 먹고 있다. 약이 나의 일상을 유지한다.
 

  일상이라는 단어만큼 주관적인 것도 또 없다고 문득 생각했다.
  10월에 충동적으로 대만에 다녀왔다. 괜찮은 여행이었다.
  사람이 거의 없는 온천에 들어가 창문 밖 풍경을 보면서, 이렇게 평화로운 순간에도 우울감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는 나 자신에 놀랐다.

  잔잔한 우울감이 나에게는 평온한 일상이다. 어떤 사람들은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해할 필요도 없다.)
  나 자신을 산산조각내고 싶고,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고, 당장이라도 건물에서 뛰어내리거나 차도로 뛰쳐나가고 싶은 순간에서 잔잔한 우울감을 느끼는 순간으로 끌어올려주는 것이 약이다.
  이런 것이 나의 일상이고 나의 삶이다. 
  이런 사실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받아들인다면 언제쯤?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서, 나 자신이라는 존재와 화해하기까지는 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릴까?

 

(10월 9일에 쓰기 시작해 11월 27일에 마무리하고 지금 업로드하는 글)

by 끝에 e가 있는 앤

농담

카테고리 없음 2019. 6. 24. 06:27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끔찍한 농담 같다.

 

  여기 글을 쓰지 않은 지 6개월이 넘었다. 올해 초 쯤에, 한때 상태가 괜찮았던 적이 있었다. 이 블로그를 없애도 되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3월까지만 해도 나쁘지 않았던 것 같다. 4월? 모르겠다. 5월에는 확실히 나빠져 있었다.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고 되돌아보고 싶지도 않다. 계기나 원인 같은 것은 찾을 수도 없고 찾는 의미도 없다. 어쨌든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 나는 이제 '드디어' 한계가 왔다고 생각했다. 한번 나빠지기 시작하니 그 뒤로는 속수무책이었다. 내 상태와는 전혀 상관 없이 해야 할 일은 쉴새없이 몰아쳤고 손 쓸 도리가 없었다. 모든 것이 밀리기 시작했다. 나는 거의 모든 수업의 과제를 제때 제출하지 못했고 지각도 밥먹듯 하게 됐다(유일하게 내세울 만한 게 학교 열심히 다니는 것이었기 때문에 예전에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가장 나쁜 신호는 이렇게 굴러 떨어지는 모습을 내 스스로 마치 제 3자인 것처럼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예전 같았으면 큰일 났다, 어떡하지, 망했다, 이렇게 생각했을 일이 마치 남의 일인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잘 해야겠다는 욕심도, 잘 못한 것에 대한 미련도 생기지 않았다. 어떤 것도 나를 자극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주로 엄마)의 말에 그렇게 타격을 받던 내가 모든 말을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리게 되었다. 나도 내가 한심한데 저 사람은 내가 얼마나 한심하겠어,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특히 엄마에겐, 순수하게 정말 미안했다. 그렇지만 미안함도 새로운 동력이 되어 주지는 못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수업을 무단으로 두 번 빠졌다. 병원에 가기 위해서였다. 그 정도로 급했다. 두 번째로 갔을 때 진료실에 들어가 앉자마자 약을 늘려주실 수 있냐고 여쭤보았다. 그렇게 약이 다섯 알로 늘었다. 계산하려는데 통장에 잔고가 없었다. 4월 말에서 5월까지, 나는 스트레스 받는 대로 돈을 쓰는 버릇을 들였고 지각이 잦으니 택시도 많이 타게 되었다. 그 결과였다. 약값은 내야 하니까 엄마에게 급하게 전화해서 돈을 보내달라고 했다. 당연히 용도는 말하지 않았다. 너무나 한심하고 비참했다. 전화를 통해서, 처음으로 엄마에게 너무 힘들다고 했다. 뭐가 힘드냐면.....모든 것이 다.....그냥, 뜻대로 되지 않고.....버겁다고 얼버무렸다. 엄마는 더 열심히 하자고 했다. 맞는 말이어서 나는 동의했다.

 

  정신적 금치산자라고, 내가 자주 떠올리는 표현이 있다. 딱 지금 나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누군가 내 머리에 관을 꽂아 그 안에 든 것을 전부 다 빼내어간 느낌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것 자체가 관성이다. 요즘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정신 뿐 아니라 몸에도 슬슬 한계가 닥치기 시작했다. 어떻게 잠들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자고 일어나면, 카페인의 힘 없이는 정말이지 숟가락 하나 들 힘도 나지 않고 몽롱하다. 예전에 사람은 '왜 사는지'를 자꾸 생각하기 때문에 힘들어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 생각도 이제 나에게는 사치이다. 왜 사냐, 어떻게 사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살 수가 없다. 2시간을 자도 악몽을 꾸는데 사실 그게 악몽이 아니라 깨어있는 순간이 악몽처럼 느껴진다. 악몽이라기보다는 장난이고 농담이다. 이런 삶이 내일도, 모레도, 그리고 그 다음에도 이어질 거라는 사실이, 나에게는 믿기지 않는 끔찍한 농담이다.

by 끝에 e가 있는 앤

구토

카테고리 없음 2018. 11. 29. 05:47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하기가 좀 그렇긴 한데 나는 토하는 것이 정말 싫다. 여기에 글을 쓰는 것은 토하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무심코 했다. 조금이나마 속이 편해지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무언가를 토해내야 하는데 그 과정은 정말 고통스럽고 오래 걸린다(벌써 몇 번이나 한심한 소리를 쓰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여기서는 물을 내리고 치워버리는 대신 토해낸 결과물을 저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 결과물을 스스로 다시 보면서 곱씹는 것이 별로 괴롭지 않았다. 내 과거, 신상, 인간관계 같은 것과 거의 관련이 없는 비교적 '무난하고' '깊이 없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이야기에서 그런 부분만 골라서 공개하는 걸 아주 잘한다. 거의 유일한 특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렇지만 앞으로 쓸 내용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물론 신상을 완전히 공개하는 일은 없겠지만). 개인상담을 받을 때도,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해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긴장감을 제외하면 초반에는 그렇게 괴롭지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내 속 깊은 곳에 있는 무언가를 꺼내는 것이 너무 힘겨워졌다. 입을 열 때마다 도르래로 아주 무거운 돌을 끌어 올리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어느날 나는 상담을 받다가 울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운 것은 거의 처음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어려워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에게는 특히 어려운 일이다. 다른 우울장애나 불안장애 환자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상담사 선생님이 나에게 '자기 얘기를 하기 어려워한다'고 말씀하시기는 했다. 맞다. 나에게는 정말 어렵고 괴롭게 느껴진다. 단순히, 소위 말하는 '내 안의 어둠'과 마주하는 것이 꺼려지기 때문만은 아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시기하는 마음 같은, 그런 어두운 부분은 크기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있다. 물론 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게 어떤 건지도 이미 알고 있다. 지금 하는 얘기는 그런 얘기가 아니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 말하기 어려워하는 것은 단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나는 나의 병과 고통이 나 자신의 면면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안다. 어떻게 비유를 하면 좋을까? 어느날 갑자기 손끝이 썩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 거울 앞에 섰는데, 몸 전체를 찬찬히 살피다 보니 어느새 내 몸 전체가 썩어서 손쓸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기분이라고 하면 좀 전달이 될까? 병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 보면 반드시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생각, 지금까지 타인과 관계를 맺어 온 방식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모순을 발견하고 자기혐오에 시달린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결국 문제는 병이 아니라 내 삶 자체였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내가 지금까지 했던 모든 선택들이 나를 여기로, 그러니까 병으로 끌어당긴 것이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살아갈 수 있을까? 

  아직 나는 모르겠다......상담하면서 나는 '지금까지 잘못 산 것 같다'는 말을 참 많이 했다. 사실 지금도 잘못 살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면 좋을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병원을 빠지지 않고 약을 꼬박꼬박 챙겨먹는 것 뿐이다. 


  '모르겠다'는 말이 나와서 하는 얘긴데, 정말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이 얘기도 상담에서 정말 많이 했다). 구체적으로 어디가 문제였는지? 지금까지의 내 인생이 다른 사람의 인생과 어떻게 달랐는지? 이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평범히 살아 온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 어긋났는지? 나의 어떤 행동과 어떤 생각이 나를 이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는지? 왜 나는 남들이 겪지 않는 이런 고통을 겪고 있는지? 

  어쩌면 사실 나는 무엇이 문제였는지 이미 알고 있는 것은 아닐지? 그런데 마주하기가 무서워서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지? 어떤 특정 부분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정말 전부 다 잘못되어서, 정말로, 손쓸 도리가 없게 된 것은 아닐지? .......

  이렇게 나는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결국 횡설수설하고 만다. 남는 것은 괴로움 뿐이다. 그렇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도 없다. 아무리 바쁘게 지내면서 벗어나려고, 이런 생각을 차단하려고 애써도 방심한 순간에 나를 찾아온다. 나는 미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다.


(제목을 고민하다가 '구토'로 결정했는데, 실제로 정신질환 때문에 토한 적은 아직까지 한번도 없다는 사실을 명시해 둔다.)

by 끝에 e가 있는 앤

  그동안 상태가 별로 좋지 않았다(그러고보니 이건 내가 병원에서 진료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하는 말이기도 하다. 갑자기 떠올랐다). 바빠서 병원에 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11월 2일까지 끝내야 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날 오후부터 다음날 오전까지는 가족여행도 잡혀 있었다. 생리도 엄청 심했다. 최근 1년 동안 이렇게까지 심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피가 쏟아졌다.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도 많았다. 거의 대부분이 중요하고 어려운 결정이었다. 원래 긴장을 많이 하거나 초조하고 다급할 때 그게 바로 몸 상태로 나타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여러 일이 겹쳐서인지 두통과 오한이 너무 심했다. 과장 하나 보태지 않고 몸을 가눌 수가 없었다. 컴퓨터 앞에 앉는 것은 고사하고 글자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내내 어지러웠고 대중교통을 탈 때는 중간중간 내려서 쉬어 줘야 했다. 진통제를 하루에 이렇게 많이 먹은 것은 살면서 처음인 것 같았다. 

  그동안 잠을 하루에 두 시간씩 자서, 운동 부족이라, 아니면 제대로 안 먹어서 그런가 생각하고 11월 4일엔 바람을 쐬러 외출을 했다가 정말 길바닥에 쓰러져서 죽는 줄 알았다(걷다가 너무 어지럽고 메슥거려서 근처에 있던 종합병원의 장례식장이었는지 응급실 화장실에 들어가 토하려고 해봤지만 뭘 잘못 먹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화장실 바닥에 앉아서 울 뻔했다). 그 다음주에는 어지럼증 때문에 이비인후과에 가 봤다. 청력 검사와 어지럼증 검사를 하고(4만원을 내고) 귀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신경과 같은 곳에 가서 머리 사진을 찍어보라고 했다. 엄마는 계속 이어폰으로 노래를 너무 많이 들은 게 아니냐고 했다. 


  정신이 나가기 일보 직전이었다. 사실 이미 나간 것 아닌가 싶었다. 몸이 아팠다는 얘기만 계속 쓰는 이유는 정신적으로 얼마나 불안정했는지 설명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 기간동안 내 정신 상태는 정말 벼랑 끝에 몰려 있었는데 이걸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늘 지나고 나면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이렇게 기록을 하려고 마음먹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에는 내가 자살사고에 시달릴 때 남긴 기록이 있어서 찾아 왔다. 11월 5일의 기록이다 : "정신을 파먹히는 기분......몸이 갈기갈기 찢기는......아니 찢긴다기보단 물 위에 올려놓은 종이처럼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는 느낌(이다). 차라리 진짜 종이처럼 녹아 사라졌음 좋겠는데......그냥 고통스럽기만 함......뇌가 녹아내리는것 같음" 잠들 때마다 악몽을 꾸기도 했다. 사실 악몽이 얼마나 끔찍한지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다. 내 주변 사람들은 대부분 성격이 무던한 건지 꿈을 잘 꾸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악몽을 자주 꾸는 편이고(특히 불안하거나 긴장하고 있을 때), 사람이 악몽을 매일매일 꾼다면 금방 미쳐버릴 거라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쯤에야 나는 나에게 필요한 것이 정신과 약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을까? 왜 처음부터 이 비정상적인 고통의 원인이 스스로 반강제 단약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못했을까? 나에게 약이 없을 때 상황이 이렇게까지 나빠질 거라고 생각하기 싫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면서도 그냥 병원에 예약 전화를 하는 것이 쉽지 않았던 탓도 있기는 하겠지만.


  며칠 전 비가 엄청 많이 오던 날 결국 병원에 갔다. 원장님에게 왜 약이 떨어졌을 때 바로 오지 않았냐는 말을 들었다. 지금은 약의 비중이 제법 커졌기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을 거라고, 그게 당연한 거라고 하셨다. 왠지 좀 죄송했고(나같은 사람들 치료하기 너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원을 나오면서는 좀 서글펐다. 약이 나를 지탱하는 데에 이렇게 많은 역할을 하고 있는 줄 몰랐다. 모르거나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았다. 나는 병을 그래도 꽤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생각만큼은 아니었나 보다. 어쨌든 앞으로는 병원에 꼬박꼬박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런 경험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이번은 아니고 저번에 병원에 갔을 때 지금 먹고 있는 약의 이름을 여쭤봐서 처방전을 뽑아 왔다. 나를 지탱하고 있는 약의 이름과 복용량은 다음과 같다. 파록스씨알정12.5mg 1개 / 리보트릴정 1개 / 설피딘정200mg 0.13개 / 인데놀정10mg 1개)

by 끝에 e가 있는 앤

태도

카테고리 없음 2018. 10. 14. 05:46

  나는 서점에 자주 간다. 책은 별로 읽지 않지만 요즘 어떤 책이 나와 있는지 구경하는 게 재미있다. 최근 가장 화제인 책을 꼽자면 역시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인 것 같다. 저자가 자신의 우울증에 대해 쓴 책이라는 것은 알았는데, 솔직히 읽어 보지는 않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일기나 에세이를 읽는 것은 좋아하지만 자기 우울증에 대해 쓴 글은 읽고 싶지 않다. 이렇게 써 놓고 나중에 시간이 나면 읽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기분은 그렇다. 


  나는 내가 정신질환에 편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자가 여성혐오를 할 수 있고, 디나이얼(혹은 디나이얼이 아니더라도) 동성애자가 호모포비아일 수 있는 것처럼 정신병자가 정신질환을 혐오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자신의 병에 대한 미묘한 태도를 제쳐놓고서라면, 무의식적이라면 몰라도 내가 정신질환에 대해 혐오를 띤 말을 드러내 놓고 하는 일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소위 '정병러'들에게 가지고 있는 편견을 하나하나 늘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내가 스스로 그런 편견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른 '정병러'들과 나의 차이를 무의식적으로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SNS 등지에서 다른 '정병러'들의 말이나 삶을 보고 싶지 않고, 볼 때마다 거울을 보는 것처럼 괴롭기도 하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는 우울장애와 불안장애를 가진 다수의 사람들과 내가 병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이다. 한 예로 나는 '정병러'라는 말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내 병 때문에 늘 고통스럽고 이 병을 좋아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다. 물론 '정병'이나 '정병러'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한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다만 병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는 얘길 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의 눈에 나는 정상성에 지나칠 정도로 집착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다. 나도 그 점은 인정한다. 하지만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다.

  둘째 이유는 위의 이유와도 연결되어 있는데, 내가 내 병을 정말로 혐오하고 나아가 인정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개인상담을 12번 받고서야 겨우 내가 정말 심한, 그래서 당장 치료가 필요한 우울장애와 불안장애 환자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조금이나마 덜 부끄럽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부끄럽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계속 '원래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어쩌다 이렇게 됐지? 어디서 잘못된 거지? 나는 어디서 그르친 거지?

  병이 심할 때 나는 정말 순간순간 죽고 싶다고 느낀다. 동시에 죽고 싶다고 느끼는 나 자신을 혐오한다. 그쯤 되면 죽고 싶은 건지 죽이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 왜 혐오하냐면 병을 앓고 있는, 무기력하고 나약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이 지경까지 와 버린' 자신이 싫기 때문이다. '나는 다르다'는 생각은 이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지금도 '그런' 사람들과는 다르다. 어떻게 다르냐고? 나는 열심히 살고 있다......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나는 내 병에 몰입해 울고불고 하는 '드라마퀸'이 아니다......나는 '평범한' 사람이다.......그러니까 나를 '그들'과 같이 보지 말아 달라. 다른 사람들은 둘째치고 결국 나 자신에게 하나도 득이 되지 않지만, 나는 이런 생각들을 끝까지 놓지 못한다.

  

  나중에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더 쓸 기회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물론 자기 병에 지나치게 몰입해 버리는 바람에 보다 나아지는 과정에 반드시 필요한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맞고, 내가 그런 사람들을 굉장히 비판적으로 보고 있는 것도 맞다. 사실 비판적이라기보다는 경계하고 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 나는 병을 치료하는(이 치료라는 것이 꼭 완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데에는 환자의 노력도 필수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내 상태를, 이 지경까지 왔는데도 정말 아직도 제대로 인정하지 못하고 가끔은 혐오하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당장은 쉽지 않더라도, 나도 많은 환자들처럼 이 병이 좀처럼 떨어지기 어렵다는 점을 인정하고, 눈앞에서 치워버리려고 하기보다는 어떻게 잘 달래서 같이 살아갈지 그 방법을 천천히 모색해 봐야 할 것이다. 위에도 썼지만 지금 같은 태도는 나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거의 자아분열에 가까우니까.

  사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최근 몇 주 간은 이런 일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일을 생각하기에는 보다 현실적인,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신체적인 증세들 때문에 머리가 꽉 차 있었다. 그 증세들에 대해서는 이미 메모장에 정리해 두었으므로 다음에 적으려고 한다.

by 끝에 e가 있는 앤

위기

카테고리 없음 2018. 9. 21. 04:06

(9월 18일 오전 4시)


 노트북 앞에 앉으면 집중이 잘 되지 않고 자꾸 딴짓만 해서 아예 씻고 누워 메모장에 쓰고 있다. 오늘 내가 집에 도착하는 대로 정리해서 티스토리에 옮겨 붙이려고 한다.


  그동안 많은 얘기들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 이 창을 켜서 한 문단 넘게 쓴 날도 있었다. 하지만 결국 임시저장만 하고 꺼 버렸다(그리고 티스토리의 임시저장 기능은 별로 믿을 것이 못 된다). 도대체 무슨 말을 어떻게 쓰면 좋을지 계속 고민했다. 주제를 미리 잡아 놓고 나름 체계적으로 쓰는 것이 좋을지, 아니면 그날 생각나는 것을 자유롭게 쓰는 것이 좋을지 같은 것을 고민하면서 계속 미뤘다. 전자는 부담이 될 것 같았고 후자는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나중에 보다 자세히 쓰겠지만 요즘 나는 제대로 된, 그러니까 상대방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전혀 못 하고 있고, 이것이 스트레스 원인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렇게 계속 미뤘다. 두려움 → 고민 → 미루기, 요즘 내 일상은 모두 이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고 실제로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


  아직도 어떤 방식이 좋을지, 나아가 이런 걸 쓰는 게 과연 의미가 있기는 할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껏 살아오면서 맞닥뜨린 적 없는 위기를 겪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한 것 같다. 더 미루면 정말 안 될 것 같았다. 한 줄밖에 못 쓰더라도 일단 뭐라도 남겨 놓는 것이 낫다는 마음으로 이 글을 적고 있다.


  아무튼 요즘 나는 위기다.

  여러 증세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과 연락을 못 하게 됐다. 카톡, 문자, 트위터, 인스타 모두 마찬가지다. 트위터에는 내 신변에서 비교적 먼 편이고 (어떻게 보면 그 점 덕에) 나의 이런 상태를 아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나마 좀 편하지만, 멘션이나 디엠 답장을 하는 것도 쉽지는 않다. 메시지를 받고 나서 한참 기다렸다가 답장하는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고 가끔은 손이 덜덜 떨리기도 한다. 보내 놓고 다시 답장이 오면 그걸 보는 것도 두렵다. 카톡은 말할 것도 없다. 상태 메시지에 '당분간 답장 느립니다' 라고 바쁜 척을 해 두었다. 평소 카톡을 많이 받는 사람도 아니지만 오더라도 답장을 할 수가 없다. 답장하는 것이 어렵다. 무섭다. 이전까진 도대체 어떻게 답장을 했는지, 어떻게 사람들과 평범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았는지 모르겠다. 고백하자면, 지금도 카톡에는 최근 한 달 간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가 100개 정도 쭉 쌓여 있다. 가장 친한 친구인 J의 카톡이나 단톡의 중요한 공지 정도만 확인하고 밑에 있는 메시지들은 확인도 답장도 대책 없이 미뤄 놓은 상태이다. 메시지들을 보낸 상대는 이제 기다리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관계 몇 개가 끊어질까? 누가 나 같은 사람을 견뎌 줄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 점점 더 무서워진다....


  개인상담을 받았을 때 스스로를 고립시키지 말라는 말을 참 많이 들었다. 사실 (적어도 지금까지는) 외부에서만 봤을 때 내가 고립된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일단 해야 할 일은 다 하고 있다. 병을 알기 전에도 그랬고, 알고 난 후에도 이것 때문에 일을 미룬 적은 없는 것 같다(그게 잘못됐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 좋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집에서는 방 안에 있는 시간이 길긴 하지만 다른 집과 비교해서도 가족 간의 대화 시간이 긴 편이다. 친구가 대단히 많은 것은 아니지만 내가 딱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있고 관계도 원만하다(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주변에 정말 활동적인 친구들과 비교해 보면 사람들과 자주 만나는 편은 아닌 것 같지만 원래 혼자도 잘 노는 성격이고 운동도 하고 있다.

  상담을 하면서 방의 문고리를 잡는 것이, 그러니까 방 밖으로 나가는 것이 두렵게 느껴지기도 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요즘 그런 식의 두려움은 별로 느끼지 못한 것 같다. 대신 요즘은 어딜 가든 방 안에 갇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방을 나와도 그 안에 있는 것과 똑같다는 얘기다. 벽장처럼 작게 쪼그라든 방을 내가 짊어지고 다니는 것 같다. 예전에는 방을 나오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이제는 어디든 내 방이나 마찬가지니까 어딜 가든 숨을 쉴 수가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움직이고 말하는 것이 전부 방 안에서 창문으로 바깥을 보는 것처럼 느껴진다. 가끔은 내가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몸의 다른 부분은 다 죽고, 돌아다니면서 다른 사람들을 관찰할 수 있는 눈만 남은 기분이다.


  이렇게 적어 보니 나는 확실히 정서적으로 고립된 것 같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외롭지 않다. 정확히 말하면 이 정신 안에 외롭다는 감정이 들어설 곳이 없다. 외로움을 느끼기에 나는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정말 끔찍하게 무섭다. 접촉하고 싶지 않다.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멀쩡히 살아갈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대로 가면 실제로 고립되는 것도 시간문제일 것이다. 지금처럼 어떻게든 꾸역꾸역 이전과 똑같은 모습을 유지하는 것도 언제까지 그럴 수 있을까? 한계가 오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까? 이런 생각들은 나를 정말로 두렵게 한다.




(21일 오전 4시에 고치면서 덧붙임)


  한심한 얘기지만 그동안은 무서워서 병원에 전화도 걸지 못했다. 이틀 전인 수요일에 겨우 용기를 내어 예약을 했다. 오늘은 오랜만에 병원에 간다. 

by 끝에 e가 있는 앤

  어제 친구와 이야기를 하는데 어쩌다 우울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알고 보니 친구의 친구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그래서 밖에도 못 나가고 아무것도 못 하다가 결국 병원에 다니고 있다는 얘기였다. 친구는 깜짝 놀랐다고 했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다고, 그러다 아무 말 없이 자살하는 거 아닌가 겁났다고 했다. 

  엄마에게도 비슷한 얘기를 종종 듣는다. 아는 사람이 공황 장애 진단을 받았다고, 그런 건 연예인이나 관계 없는 사람들 얘기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가까이 있었다고, 세상이 무서워졌다는(?) 뭐 그런 얘기들이다.

  아무튼 친구에게 홧김에 말해 버렸다. 친구는 당황한 것 같았다. 어쩌다가 그렇게 됐냐고 물었는데 대답할 수가 없었다. 타고난 성격 탓이 있지 않을까? 라고 답했다. 대화 내용을 하나하나 쓰지는 않겠지만(솔직히 기억도 안 나고) 나는 친구가 머릿속에서 내가 옛날에 했던 말과 행동들의 원인을 병에 끼워 맞추기 시작하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이건 사실 내가 가장 우려했던 결과다. 그 다음 밥도 잘 먹었고 재미있게 놀고 집에 왔는데도 계속 켕기는 것처럼 기분이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도 후회스러웠다. 


  내가 우울증, 공황 및 불안 장애를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거의 없다. 첫째로는 내가 주변에 이야기하지 않기 때문이고, 또 겉으로 보기에 나는 굉장히 멀쩡하게 생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은 내 일상 속에 침투해 들어온 것으로 모자라 이미 정신 대부분을 좀먹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에게도(상담도 끝났으니 정말 아무에게도) 내 상태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내 대외적 이미지(좀 웃기긴 하지만 분명 그런 게 있긴 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껏 헛으로 살아온 건 아니니까....)에 정신질환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도 다른 사람에게 병 이야기를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이 병 자체가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나는 점점 내 병에 대해 모르는 사람과는 만나기도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물론 아는 사람과도 쉬운 건 아니다. 만날 때마다 양해를 구할 수는 없으니까.

  이런 의문도 든다. 내 병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꼭 이야기해야 할까? 그게 맞는 일일까? 왜 다른 사람이 이런 짜증나고 불편한 이야기를 (그것도 횡설수설해서 제대로 알아듣기도 힘들 텐데) 들어줘야 할까? 왜 이해해줘야 할까? (이 질문들은 나를 너무 힘들게 한다.)


  아무튼 이런 여러 이유들로 여전히 병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은 쉽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내 상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계속 혼자 싸우는 것은 괴로운 일이고, 이게 내 예상보다 장기적인 싸움이 되고 있기 때문에 기록의 필요성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여기 적기로 했다. 24시간 병 생각만 하는 건 아니니까 평범히 먹고사는 얘기도 들어가긴 하겠지만 일기라고 하기엔 좀 그렇고 매일 쓸 예정도 없다. 그냥 필요를 느낄 때마다 올라오는, 내 병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by 끝에 e가 있는 앤